흥부와 놀부 이야기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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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순수의 시대>
 
다음 날 일찍 나갈 채비를 마친 그녀와 하인 몇 명은 시장으로 향했다. 일반 시장과는 조금 다른 느낌에 하인들은 이동하는 내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하인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 곳은 한 중국 거상의 집이었다.
 
"어디 물건 한번 볼까요?"
 
배불뚝이 거상은 거만한 자세로 앉아 그녀를 하대했다. 그녀는 그런 대접에도 아랑곳 않고 보따리를 풀었다.
 
"이것입니다."
 
그녀가 물건을 꺼내 보이자 사내는 흠칫 놀라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음... 이건...
 
"거상님께서 생각하지는 바가 맞습니다."
 
거상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흐렸다.
 
"어... 이건 우리가 사기엔 좀 뭐랄까... 그렇지 않은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그녀는 그의 그런 모습을 놓치지 않고 몸을 기울여 숨기려는 물건이 무엇인지를 빠르게 확인했다. 눈 깜짝할 새였지만 그녀는 흥부네 물건을 봤다. 이미 이곳까지 흥부네의 물건이 뻗어있었다.
 
"네. 뜻이 그러하시다면 다음에 더 좋은 물건을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거상은 쉽게 물러나는 그녀가 조금 의아했다. 평소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여자가 오늘만큼은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을 보니 믿기지 않았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치며 풀었던 긴장을 다시금 조였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가고도 한동안 불안함에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미 다른 나라에도 흥부의 물건이 팔리고 있다.' 그녀는 다른 상인들을 찾아가 봤지만 처음 보는 물건에 신기해하면서도 구매를 권하자 강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물건을 보며 신기해하는 상인들은 흥부네 물건이 없는 것이 확실했지만, 관심을 보이다가도 판매 이야기만 나오면 모른 척 말을 흘리거나 화제를 전환하려 애썼다.
 
그녀는 그때 하인이 지적한 사항 중 하나인 '외설스럽다'라는 말을 기억해냈다. 다시 보니 확실히 그 모양새가 거부감이 들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만이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상인들의 수상한 행동에 배후에 무엇인가 개입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며칠 새에 윤기가 흐르던 그녀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본인 스스로 대박과 동시에 흥부네를 몰락시킬 최고의 물건이라 자부하고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 흥부네는 흥부 혼자 만들기 때문에 사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은데 팔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고 대량으로 만들어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몇 개 만들어서 팔아보고 결정하는 건데.'
 
그녀는 자신의 실수에 자괴감을 느꼈다. 스스로가 완벽하고 치밀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세운 계획은 한번도 어긋난 적 없이 완벽하게 이뤄졌었다. 이번 한 번의 실수로 그녀의 모든 것이 날아가게 생겼다. 방법을 찾아보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재산은 거의 다 소진해 다른 식으로 변형해 판매하기에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이 아닌 새것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나마 남은 돈으로 천천히 벌어보려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떠오르는 것은 새로운 모양이 아닌 날려버린 재산밖에 없었고 남은 재산으론 10개도 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흥부네처럼 눈과 입을 만들어 다시 상인들을 찾아다녔지만, 이번에도 거절과 함께 빈손으로 집으로 와야만 했다. 그녀는 저번에 들었던 생각이 확신하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방해를 하고 있었다. 모든 상인이 하나같이 같은 태도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미리 다른 상인들에게 말을 전해 놓은 것이라 확신했다. 그녀는 절망과 자괴감, 분노가 섞인 한숨만을 쉬지 않고 뱉어냈다.
 
"아우야! 아우야!"
 
저 멀리서 형님이 미소를 지으며 뛰어왔다. 형님의 밝은 표정에서 흥부는 좋은 소식임을 직감했다.
 
"아우야! 드디어 때가 온 것 같다!"
 
"어떤 때 말씀이세요. 형님"
 
놀부는 오른손을 들어 목이 잘려나가는 손짓을 했다.
 
"뭐긴 뭐야 임마! 네 형수가 망해 버렸으니 복수의 때를 말하는 거지 않겠냐!"
 
흥부는 놀부의 말에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꽤 오래 걸렸네요. 진짜 집념 하나는 인정해줘야겠습니다."
 
놀부는 예상하지 못한 흥부의 침착한 반응에 의아해했다. 그때 숨이 차서 주변의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던 놀부의 눈에 중국인 여자가 들어왔다. 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죠?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거예요?"
 
여자의 말에 흥부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놀부는 둘만이 아는 이야기에 궁금해하며 알려달라는 손짓을 보냈지만, 흥부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표시하고서는 입 모양으로 '나중에요' 라고 말했다.
 
"마무리는 내가 할게요. 맹세하는데 충분히 만족할 거로 생각해요."
 
여자는 말을 마치고선 몇 명의 무리와 함께 놀부네로 향했다.
 
"무슨 일이냐 아우야?"
 
"이야기가 길어요. 형님.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흥부는 밖에서 하기에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방 안으로 놀부를 들였다.
 
"얼른! 얼른 말해 보아라! 설마."
 
놀부는 흥부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야기를 재촉했다. 놀부에겐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제가 저번에 말한 그 중국 여자예요. 기억나시죠?"
 
놀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에 다시 저희 집을 방문했었는데 갑자기 납치당해 협박하고 험한 꼴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이대로는 다
시 돌아갈 수 없다고 범인을 한참을 찾아다니더니 며칠 뒤에 찾아낸 것 같다고 화난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말을 끊고는 벌어진 일에 대해 다 듣게 되면 앞으로 자기가 하려는 일에 대해 간섭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일단 이야기는 들어봐야 하니 알겠다고 이야기해 보라고 재촉하니까."
 
잠시 숨을 고르는 흥부에게 놀부는 계속해 보라고 손을 파닥거리며 재촉했다.
 
"형수. 가 범인이었답니다. 그리고 놀란 점이 제가 누명 쓴 일도 알게 됐다고 말하는데 그사이에 어디까지 알아낸 것인지 조금 무서웠습니다. 어쨌든 형수가 더는 활개 치지 못하게 막아버리면 알아서 자멸할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가 되면 자기가 알아서 그 일에 대한 벌을 내린다고 했습니다. 제가 아주 착하다면서 그냥 봐주면 언젠가 또 이런 상황이 반드시 올 테니 자기 손에만 피를 묻히겠다며 말하는데 눈빛에서 강한 의지가 불타올라 반박할 수도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놀부는 흥부의 말에 놀라며 물었다.
 
"그럼 지금 저 여자가 형수를 죽이려고 간다는 거냐?"
 
"그건 아닙니다. 살아있는 지옥을 맛보게 해준다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놀부는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흥부는 그런 놀부를 보고 '그동안 얼마나 당했을까?'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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